다시 시작한 글또
지난 5월로 글또 9기 활동이 마무리됐다.
10기가 시작할 때까지 몇 편이나 글을 쓰게 될까? 그래도 다섯 편 정도는 쓰게 되지 않을까?
...했지만 한 편도 못 썼다.
초안을 가볍게라도 작성해둔 게 23편, 그래도 구색 갖춰둔 게 2편 정도 있는데
어느 하나 완성 시키질 못했다.
그리고 10기 시작일이 다가와버렸다!
마감이 사라지니 끝맺는 일도 사라졌다.
뭐랄까, 제논의 역설처럼 움직이는 듯 보이나 도달은 못하는 그런 느낌?
과학계에서는 '마감력'이라는 새로운 힘을 추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무지 글 하나가 끝나지 않는 이 이상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아무튼. 새로이 10기 활동을 열렸으니 내게 마감력이 돌아온 것이다.
우선 남겨두고픈 그동안의 지냄, 그리고 그간 온전히 끄집어내지 못했던 생각들을 적어보자.
새로운 팀
이직한지 그새 1년이 지나있었다. 돌이켜보면 적응하는 데 반 년 정도 걸린 것 같다.
합류 직후엔 신생 스타트업인데다 시기상 연말연초도 겹쳐서 전체 사업과 팀원들을 살펴보기 바빴다.
문제는 그 다음 3개월이었다.
지난 창업의 여파가 그제서야 온 듯 했다.
창업했던 회사를 나왔을 땐 건강을 회복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되고선 합류 제안을 받아 바로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신체적 여파는 맞이가 끝나있었으나 정신적 여파는 그제야 다가오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회사 일에 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 여파는 여전하지만, 그래도 어찌저찌 긴급 봉합하고 안정기에 접어들긴 했다.
지금은 꽤나! 업무에 몰입하고 있다.
요즘 가장 집중하고 있는 건 '회사 개발 문화 조성'이다.
우리 회사는 석박 출신의 인공지능 분야 연구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우선 연구 자체가 내 전문이 아닌 데다 AI쪽은 실무적으로 다뤄본 적도 없어서
연구원분들의 파이썬 코드를 보고도 뭐라 의견을 내기가 어려웠다.
(내가 자신있는 언어 역시 파이썬이 아닌 JS/TS니까)
의견을 내기 어려웠단 건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싶지만 차마 의견을 내고 대안을 제시하기엔 자신이 없었단 뜻이다.
하지만 AI가 중심인 회사인 만큼 파이썬 코드 퀄리티는 몹시 중요하다.
연구 레벨에선 중요치 않을지 모르지만 제품화 단계까지 밟아야 하는 회사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제품은 연구와 달리 장기적인 유지보수가 필요하며, 예비 입사자는 회사의 코드 퀄리티를 보고서 실망한 채로 돌아설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말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파이썬을 프로덕션 레벨로 끌어올려갔고,
실무에서 AI 코드를 어떻게 관리하고 테스트하는지 배워나갔다.
어느 정도 학습을 마치고서는 직접 사내 세미나를 열었다.
제목은 'Production 레벨 파이썬 협업하기'였고, 부제는 '연구원들을 위한 실무 파이썬'이었다.
결과적으로 사내에서 사용할 파이썬 프로젝트 템플릿이 만들어졌고 신규 프로젝트들은 해당 템플릿을 기반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 회사의 연구원분들은 모두 전남대학교 출신인데, 내년에는 회사를 넘어서 전남대 연구실 전체를 대상으로 발표할 기회를 만들어보려 한다. 애써 괜찮게 자료 만들어가고 있는데 우리 회사 차원에서만 머무르는 건 좀 아까우니까.
안정인가 안주인가
그래서인지 요즘 부쩍 만족스럽단 생각이 든다. 생활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업무도 잘 진행중이고, 여가생활로 기타 레슨도 다시 받고 운동도 조금씩 하고 있다.
더 바랄 게 없는 생활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이없게도 그래서 좀 무섭다. 더 바랄 게 없나? 이거면 된 건가?
행복하다... 행복한데, 이게 전부일까? 더 욕심낼 부분은 없나?
더 시간을 쪼개서 잘 쓸 순 없을까? 분명 낭비되는 시간을 더 없앨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면 안정과 안주를 헷갈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든다.
기껏 안정에 도달해서 호흡 가다듬고 있는데 이것조차 안주라고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그 느낌을 판가름할 수 있게 돕는 게 기록인 것 같다.
마라톤에서 거리별 페이스를 기록으로 찍어두듯 어떤 호흡을 언제, 얼만큼했는지 남겨둔다면 더 쉽게 알 수 있을 테니까.
근데... 글또 10기가 끝나면 내 마감력은 어쩌면 좋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