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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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도

발자취가 밝힌, 밟혀나간 곳들

날(日)을 이유로 날(我) 정리해야 하는 때가 찾아오곤 한다. 취직, 이직, 휴식, 회고 등등... 이유가 될 날들이 다양한만큼 이유의 해소가 될 기록도 여러 형태를 띤다. 공통점이라면 은근 주기적으로 찾아온다는 거?

이번 계기는 글쓰기 모임 지원이었다. '난 어떻게 내가 되었는지' 지원서에 적어내야 했다. 마침 잘됐다싶었다. 2020년 여름즈음 이력서 목적으로 써뒀던 구구절절한 자기소개서가 자꾸만 눈에 밟히던 참이었으니까.

최근에 이력서가 필요해서 다시 그때의 자기소개서를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이력서로 쓰기엔 너무 사사로운 글처럼 보였다. 이력서엔 내가 어떤 사람인지보다도 어떤 인력인지가 더 돋보여야 하는데 사적인 비중이 꽤 크게 느껴졌고, 결국 필요했던 이력서는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야 했다.

여기엔 그렇게 잘려나가야만 했던 길고 사사로운 얘기들을 적어두려 한다. 이 사람이 얼마나 유용한 도구를 들고 있는지를 설명하기보다 어떻게 그 도구를 쥐고 여기 서있게 됐는지에 대한, 그런 이야기 말이다.

삼형제

우리 집은 삼형제다(아들을 육아중인 부모라면 벌써 아찔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9살때까진 단 한 대의 컴퓨터만 있었다. 다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면 그 모습을 2배쯤 과장하면 그때의 현실과 얼추 맞아떨어질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을 보고선 참다참다못해 결국 컴퓨터를 한 대씩 놓아주셨다. 어릴 적엔 내가 손을 대기만 하면 컴퓨터가 망가졌고 형들은 또 컴퓨터 망가트렸냐며 한 소릴 했었다. 그리고선 벌벌 떨며 아버지에게 컴퓨터가 망가졌다고 알려야 했다. 지금이야 전화하며 사랑한단 말을 주고 받지만 어렸을 땐 아버지가 무척이나 무서웠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컴퓨터가 망가지면 옆에 있던 형들의 컴퓨터를 켜서 'OOO 고치는 법', 'OOO 증상' 같은 키워드들로 검색하여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가수리를 터득해가다 초등학교 3학년때 게임을 개조하는 커뮤니티에 가입했는데 그때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전부 중고등학생이었다. 그들과 함께 놀다보니 자연스레 컴퓨터 관련 지식이 쌓여갔고 어느샌가 일반적인 성인보다 컴퓨터를 더 잘 아는 수준이 되었다.

소질의 발견

그걸 자각했던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초등학생 때 나는 방송부에 소속돼있었고 학교 전체에 교육 영상이나 방송을 내보내는 일을 담당했었다. 하루는 재생해야 할 영상이 돌아가질 않았고 방송부 담당 선생님께서도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계셨다. 내가 보기엔 단순히 코덱이 안 깔려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 '그냥 코덱 깔면 되지 않을까요?'하고 별 생각없이 말했는데 즉시 문제가 해결됐고 주변 어른들도 놀라했었다. 남들보다 컴퓨터를 조금 더 아는 편이란 걸 처음 인식했던 순간이었다.

어릴 적부터 내 개인 컴퓨터가 있었던 것, 고장이 나더라도 형들 컴퓨터를 빌려 수리해볼 수 있었던 것, 형들에게 예절주입을 당해 중고등학생이 대부분이었던 게임 개조 커뮤니티에서도 어울릴 수 있었던 것, 내 소질을 자각할 계기가 마련됐던 것. 이 모든 순간들이 있었기에 직업으로 바라보기 전부터 컴퓨터에 대한 애착이 생겨났던 것 같다.

그런 애착에 피어나기 시작했던 초등학교 5학년 땐 해킹과 보안에 관심이 많았다. 뜯어내고 고치는 일에 관심이 많아서였는지 무언가를 뚫어내는 것에 흥미를 느꼈었다. 무엇보다 그땐 그런 게 참 멋있어 보일 나이니까. 그래서 그걸 더 잘하고 싶었고 검색을 하다보니 C언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단 걸 알게 됐다. 지금이야 프로그래밍을 배울 수 있는 다양한 루트가 있고 온라인 강의도 잘 되어있지만 2007년 당시엔 그저 C언어를 배우라는 답변만 찾을 수 있었다.

막막했다. 어쩌지. 지금까진 주변의 지식을 전수받아 배워왔다면 이 이상의 지식은 내 주변에서 더 이상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정말 전문적인 영역으로 들어서는 거니까. 동네 주변의 컴퓨터 학원을 물색했고, 광주에서 거의 유일하게 C언어를 가르치는 학원을 바로 집앞에서 찾을 수 있었다. 운명이라고밖엔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이었다.

아직도 그 학원에서 상담받았던 때가 생생하다. 날이 한창 추워지기 시작해 길거리에선 반팔차림을 찾아보기 힘들어지던 무렵이었다. 날씨탓인지 혼자 학원을 찾아가 긴장됐던 탓인지 난 긴팔차림임에도 몸이 조금 떨렸다. 학원 문앞에서 숨을 고른 뒤 조심히 문을 두드렸고, 학원에서 어떤 걸 가르치는지 물었다. 당시엔 다 자격증 학원밖에 없어서 여기도 자격증학원이겠지하고 반신반의하고 있던 차였다. 원장님은 '컴활이나 워드같은 자격증도 가르치고... 뭐 C언어같은 프로그래밍도 가르친다'고 하셨다. C언어라는 단어에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들리자마자 '네 그거요!! 저 그거 배우려구요!!'하고 외쳤으니.

돌이켜보면 오히려 지금보다도 그때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주변에 곧잘 알리곤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선 일기장을 통해 내가 컴퓨터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있단 걸 알고 계셨는데, 방학을 코앞에 두던 어느 여름에 담임선생님께선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IT영재교육원이 있는데 한번 지원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주셨다. 큰 흥미를 느꼈다기보다 그냥 재밌겠다싶어 지원했고 운좋게도 합격까지 이어졌다. 바로 교육을 받진 않았고 중학교 1학년때부터 2년간 영재교육원에서 교육을 받게 됐는데 그 2년이 내가 컴퓨터를 관둘 수도 있었던 2년이 될 줄은 그땐 꿈에도 몰랐었다.

소셜 네트워크

영재교육원을 다녀야 해서 중학생 치곤 나름 바쁜 2년이었다. 주 2회 학교가 끝나자마자 택시를 타고 교육청까지 가서 수업을 두세시간 받고 돌아와서는 또 학원에 가야했다. 컴퓨터 학원도, 보습 학원도. 반복되는 이 생활이 큰 스트레스였다. 하필이면 사춘기도 한창이던 때라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고, 그때를 기점으로 학업 성취가 크게 떨어지기도 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재교육원 심화과정 진급시험에선 성적이 1등이었는데 그때도 '그럼 뭐해 공부를 잘하고 있는 건 아닌데' 이런 생각에 크게 기쁘지도 않았었다. 당장 해야 할 학업과 후에 하게 될 직업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때였다.

내 첫 직업적 고민은 그렇게 2년간의 불안으로 찾아왔다. 학업적 성취가 뛰어난 상황은 아니었지만 진로적 성취가 눈에 보였기에 기쁠 법도 한데 하필 당시 개발자, 프로그래머는 대표적인 3D(Dirty, Difficult, Dangerous) 업종 중 하나였다. 노력 대비 성취나 소득이 전혀 따라주지 않는 직업이었고 소위 '갈려나가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개발자 인식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 이랬었다당시 개발자 인식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 이랬었다

불안했다. 내가 이걸 잘하면 뭐하지? 잘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아니, 근데 내가 이걸 정말 잘하는 건 맞나? 잘 할 수 있는 일은 맞나? 사실 내 적성이 아니면 어떡하지? 나 별로 못하는 애 같은데. 계속 해도 될까? 나 이대로 괜찮을까? 그렇게 2년간 스스로의 소질을 의심했고, 꿈에 무척 민감해져 있었다. 미술시간 때 장래희망을 그려야 해서 개발자인 내 모습을 그리고선 사물함에 숨겨뒀는데 그걸 친구가 꺼내봐서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었고 매일 기본으로 대여섯시간 했던 컴퓨터를 한 달간 쳐다도 보지 않은 적도 있었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너무 답답했다.

시간을 절로 흐르기 마련이고 중학교 3학년이 됐다. 전보다 여유가 생겨 불안했던 시간도 끝이 났고, 그 끝에 앉아있던 내 앞에는 여전히 컴퓨터가 놓여있었다. 업계의 현실은 더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난 아무래도 컴퓨터가 좋았고, 계속 이걸 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이 단단해질 무렵 영화 한 편을 만나게 된다.

2010년에 개봉한 소셜 네트워크2010년에 개봉한 소셜 네트워크

페이스북의 비화를 다룬 영화, 소셜 네트워크였다. 페이스북을 둘러싼 법정 기록이 주된 내용이었지만 내게 전해졌던 건 '세상을 바꾸려면 서비스를 만들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마침 내겐 그런 힘이 있었다. 내가 상상한 서비스를 내 손으로 직접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기 전까지 웹서비스는 전혀 생각치 못하던 분야였기 때문에 새로 웹개발을 배워야 했다.

웹 개발

그렇게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웹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영화에서 개발 언어로 php를 쓰기도 했고 2011년 당시엔 php로 웹개발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기에 내 웹 개발은 php와 MySQL로 시작됐다.

시선이 그쪽으로 가다보니 자연스레 내 눈길은 당시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였던(물론 지금도) 네이버로 향했다. 근데 마침 네이버에서 NHN Next라는 학교를 세운다는 말이 나오던 시기였다. 첫 학생들을 모집하려 곳곳에 홍보와 행사를 진행하던 참이었고 고등학생의 경우 그 대상은 2학년부터였다. 그때 난 고1이었고 그곳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래서 담당자분께 메일을 보냈다.

담당자분께서 보내주신 답장담당자분께서 보내주신 답장

내가 보냈던 메일은 '고2, 고3만 참여할 수 있는 걸로 아는데 난 이런 것들을 해온 학생이고 NHN은 내가 너무도 꿈에 그리는 기업이다. 난 꼭 참여해보고 싶다' 이런 내용이었다. 내 태도를 좋게 봐주셨는지 감사하게도 초청을 해주셨고 처음으로 네이버 본사에 방문하게 됐었다. 광주 버스터미널에서 혼자 판교까지 갔었던, 중간에 들렀던 휴게소의 경치까지도 여전히 눈에 선하다.

첫 서비스

그때 두근거렸던 동력이 내 몸 어딘가에 남아 여전히 날 들뜨게 만든다. 그러니 본사 방문 직후였던 당시엔 그 설렘을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도 얼른 내 서비스를 만들어 선보이고 싶었다. 마침 만들고 있던 서비스가 있었는데 인디음악이나 자작곡 소개를 주제로 한 커뮤니티였다. 음악가를 꿈꾸던 친구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게 된 서비스였고, 고1 여름방학~10월 사이에 기획부터 디자인, 개발, 운영 모두 혼자서 한땀한땀 진행했던 기념할만한 내 첫 서비스였다.

처음 받았던 응원 메일처음 받았던 응원 메일
서비스 이름에 대한 피드백 메일서비스 이름에 대한 피드백 메일
마케팅 시도를 제안해주셨던 메일마케팅 시도를 제안해주셨던 메일

한 달간 유저 200여명을 모았었는데 개발과 운영에 필요했던 금전적, 시간적 리소스때문에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이런 응원을 받아오면서도 소리소문없이 서비스를 개인사정으로 중단해버렸고, 이때를 계기로 서비스를 개발하고 운영하는 데 책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서비스를 기대했던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기는 게 얼마나 죄책감이 드는 일인지 알게 됐다. 실서비스 운영의 어려움은 두말할 것도 없고.

현실적인 문제로 중단했던 서비스였기 때문에 망쳤다고도 볼 수 있는 기억이지만 내 머릿속에 남은 건 다른 사람들이 내 서비스에 호응해주던 모습이었다. 그래서 서비스로 영향을 미치고 싶은 열망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첫 게임

근데 서비스의 형태가 꼭 '웹'일 필요는 없었다. 그때는 앵그리버드, 애니팡을 필두로 한국에서도 스마트폰 게임이 한창 크게 인기를 끌고 있어서 모바일 게임도 하나의 관심사였다.

난 고등학교 1회 졸업생이었어서 동아리를 직접 개설할 수가 있었는데, 고1때는 통기타 동아리를 만들었고 고2때는 친구들을 꼬셔서 프로그래밍 동아리를 만들었다. 동아리는 학교 축제 때 무언가 선보일 수 있어야 개설이 가능했다. 고1땐 통기타 연주로 축제에 나가면 됐는데 고2 축제는 고민이 많았다. 동아리 부원들 대상으로 웹을 가르치긴 했지만 웹사이트를 축제에 선보이는 게 재밌을까? 아무리 봐도 아닌데...

동아리 활동이 눈에 보여야 했고 축제 때 선보여야 하니 재미도 챙겨야 했다. 그래서 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2012년엔 LoL에 푹 빠져있었기 때문에 패러디 게임을 만들면 어떨까 싶었고 내 개인취향으로 '피하기류' 게임을 좋아하다보니 롤 캐릭터로 무언가를 피하는 게임을 구상했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내 첫 모바일 게임이 '리신의 기묘한 모험'이었다. '피하기'하면 떠오르는 게 가장 이동성이 뛰어나고 날랬던 리신이었고, 실제 게임에서도 곧잘 도망치는 장면이 연출되곤 해서 '궁극기나 쫓아오는 챔피언을 피하는 리신'을 모티브로 기획했다.

실제 메인 화면이었고, 화면을 터치하면 이쿠! 사운드와 함께 게임이 시작됐다.실제 메인 화면이었고, 화면을 터치하면 이쿠! 사운드와 함께 게임이 시작됐다.
당시 게임 구상 스케치당시 게임 구상 스케치
실제 개발된 플레이 화면실제 개발된 플레이 화면

리신에게 다가오는 케넨을 뒤로 밀어낸다든지, 미니언이나 와드를 타고 도망친다든지, 아니면 보호막으로 잠시 버틴다든지 그런 요소들이 있었고 축제때 스코어 1위에게 문화상품권을 지급하고 싶어서 점수 개념도 도입했었다. 그래서 미니언을 이용해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E로 미니언을 제거하면 점수를 얻게끔했다.

플레이하러 온 학생들이 꽤 있었고, 대기줄도 잠깐이나마 생겼었다. 상품을 받기 위해 계속 재도전하는 학생도 있었고. 그래서 나름 성공적으로 축제 부스를 운영했다. 게임을 기획하고, 만들고, 플레이어를 지켜보는 것 역시 즐겁고 설레는 경험이었다. 그치만 이건 내 길이 아닌 것 같았다. 흔한 표현으로 사람 냄새가 안 난다고 해야 할까. 물론 싱글게임인데다 내가 스토어에 배포까지 한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내 감상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내가 바라는 건 이런 게 아닌 것 같다는 막연한 인상이 남았다.

내가 직접 만든 게임으로 어떻게 사람과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 내가 게임을 그만큼 좋아하긴 하나? 지금 돌이켜보면 아무리 푹 빠져있었다한들 소위 게임에 '미쳐있었다'고 보긴 어려운 게이머였고 그렇기에 더더욱 파급력 있는 게임을 만들 재간은 없지 않았나싶다. 내 영향력을 온전히 펼칠 수 있는 수단이 게임은 아니란 걸 인식한 순간이었다.

소명과 감사

고2는 결국 고3이 되어야 한다. 2014년의 난 컴퓨터를 만질 용기가 없었다. 안 그래도 학업에 집중한지 너무 오래된 상황이었기에 컴퓨터 공부를 하다 수능을 망치면 후회가 클 것 같았다. 그럼에도 현역 땐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해 재수를 하게 됐는데, 이루지 못했던 건 학업만이 아니었다.

당시 내겐 10년간 짝사랑해왔던 친구가 있었다. 수능이 끝난 뒤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를 고백을 했고, 그 친구는 어김없이 거절했다. 근데 이번엔 좀 대차게. 그래서 연락도 끊겨버리고 말았다. 연인이 아니어도 상관없으니 그저 '너랑 다시 연락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연락할 수 없었다. 연락이 올 수도 없었고.

2014년의 카카오톡은 대화내역을 단순히 텍스트(txt)와 사진(jpg) 파일로 저장할 수 있는 기능만 제공했다. 그래서 백업해둔 그 친구와의 대화를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대화가 파일로 정해져있다면 이 대화를 불러들여서 카톡이 온 것처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그 친구랑 여전히 대화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진 않을까?

그렇게 2014년 겨울에 생성됐던 프로젝트가 '너랑 다시 연락하고 싶다'였다. 첫 구상은 텍스트 파일을 읽어서 실제 대화의 시간 간격 그대로 알림을 보내고 그대로 답장을 보내는 방식이었지만 일단 편리하게 대화를 볼 수 있는 뷰어 기능이 더 먼저라고 느꼈다. 애초에 나부터가 텍스트 파일 따로 사진 파일 따로 보는 게 무척 불편했으니까.

그땐 이렇게 봐야만 했다그땐 이렇게 봐야만 했다

뷰어를 우선적인 기능으로 생각하면서 디자인도 고민했는데 영화 '초속 5센티미터'의 영향으로 내게 첫사랑은 벚꽃의 이미지가 진하게 남아있다. 그래서 별 고민없이 벚꽃을 테마로 디자인했다.

초속 5센티미터초속 5센티미터

2014년에 기획했지만 재수를 해야 해서 실제 개발은 2016년 중순쯤 마무리되었고 최종 배포본은 플레이스토어에 올라갔다. 날짜 검색 기능은 당시 카카오톡에선 지원되지 않는 기능이었으나, 내게 날짜 검색은 없어선 안 될 기능이었어서 카카오톡보다 먼저 기능을 제공하게 됐었다.

배포됐던 최종 모습배포됐던 최종 모습

플레이스토어에서 다운로드 수는 2만 건을 넘어갔고 2016년부터 꾸준히 응원받은 프로젝트가 됐다. 앱에 달렸던 리뷰도 수십 건이었고 페이스북과 이메일을 통해 문의사항부터 버그, 그리고 격려의 말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가장 의미있었던 건 역시 사람에게 가닿는 서비스를 만들었을 때 내가 가장 큰 성취를 느낀단 걸 알게 됐단 거다.

성능도 언급해주셔서 개발자로서도 뿌듯했다성능도 언급해주셔서 개발자로서도 뿌듯했다
메일로도 문의가 들어오곤 했다메일로도 문의가 들어오곤 했다
가끔씩은 페이스북 메시지로도 문의가 왔다가끔씩은 페이스북 메시지로도 문의가 왔다
지금은 안드로이드 버전 문제로 플레이스토어에서 게시가 중단된 상태인데 얼마전까지도 메일로 앱 문의가 들어와 깜짝 놀랐었다.지금은 안드로이드 버전 문제로 플레이스토어에서 게시가 중단된 상태인데 얼마전까지도 메일로 앱 문의가 들어와 깜짝 놀랐었다.

2017년 초, 이 프로젝트를 뒤로 한 채 입대를 하게 됐는데 군복무를 하던 어느날 앱 상태가 궁금해져서 오랜만에 리뷰를 봤다가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여전히 내 눈물 버튼이자 원동력이 되는 리뷰여전히 내 눈물 버튼이자 원동력이 되는 리뷰

처음 든 생각은 '내가 뭐라고'였다. 대체 내가 만든 게, 내가 한 일이 뭐라고 이렇게 고마워해주시는 걸까, 난 별 거 아닌 사람인데. 화장실에서 이 리뷰를 띄어둔 채 한참을 울었다. 안 그래도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던 시기였고 난 뭐하는 놈일까 어떤 쓸모가 있을까만 생각하던 때였다. 눈물 탓에 눈앞은 흐려졌지만 그 너머에 내가 나아갈 길은 선명해져갔다. 난 사람들에게 가치를 줄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어야겠구나. 그게 내가 이번 생에 부여받은 직업적 소명이구나. 그리고서 연이어 찾아온 감정은 감사함이었다. 누군가의 감정과 추억을 온전히 전할 수 있는 이 직업을 가졌음에 한없는 감사를 느꼈다.

되짚어 나가며

그 이후에도 큼직한 일들은 많았다. 스타트업도, 대학 연구실도, 창업했던 일까지도. 앞선 내 발자취들이 그 선택들을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그 경험들은 다음에 다루려 한다. 그 기간엔 크고 작은 외주 개발이 있었는데, 사용될 게 목적이 아니라 그저 만들어지는 게 목적일 뿐인 개발이 있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됐다. 그저 만들어짊으로써 그 쓸모를 다해버린 서글픈 아이들(프로젝트들)에 대해선 아직 말을 아끼고픈 마음이다.

게다가 최근의 경험들로 밟힌 발자취들은 여전히 그 앞을 헤매는 중이다. 완전히 나아갔다기보다 아직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느낌이라 여정이 어느정도 마무리가 되었을 때 다시금 되짚어보려한다. 이번엔 여기까지의 기록으로 마무리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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