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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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적 낙관

그 녹록(碌碌)치 않은 녹록(綠綠)함
<식물적 낙관, 김금희 作><식물적 낙관, 김금희 作>

서점 '관객의 취향'

본가에선 식물을 길렀다. 부모님이 길렀기 때문에 어떤 식물들이었는지 솔직히 기억하진 못한다. 더 솔직하게는 어떤 식물인지 물었던 적조차 없었다. 돌이켜보니 너무하긴 했다. 두어 번의 이사에도 늘 함께 다녔던 식물들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그만큼이나 무신경했다는 뜻인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곁에 식물이 있는 것도 잊은 채 살아왔던 것 같다. 분명 분갈이를 하던 모습, 처음 들여오던 모습을 곁에서 본 적 있는데도 말이다. 왜 그토록 무신경했을까? 아마 나의 돌봄이 없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관심이 없었기에 돌봄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테고. 그래서인지 본가의 식물들이 꽃피고 저물었던 기억조차 없다. 정말, 그만큼이나 관심이 없었다.

본가를 떠난지 어느덧 1년이 되었고, 지금은 더 긴 시간을 약속하고픈 사람과 함께 지내고 있다. 우드톤을 좋아하고, 식물의 활기를 한껏 즐기며, 돌봄이 일상인 그녀는 작은 식물들을 들여왔다. 처음 우리와 함께 하게 된 건 '틸란드시아 이오난사'인 '봉천이'였다. 두 번째 친구는 '오렌지 자스민'인 '감찬이'. 이름이 봉천이와 감찬이인 이유는 우리가 '봉천'동에 살고 있고, 봉천동 옆에 있는 낙성대 일대에서 강'감찬' 장군으로 열심히 브랜딩을 하고 있어 그게 재밌었기 때문이다.

왼쪽이 봉천이, 오른쪽이 감찬이왼쪽이 봉천이, 오른쪽이 감찬이

일주일 정도 혼자 집을 돌봐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라 나도 그녀도 걱정없이 일주일 뒤를 기약했는데 그사이 감찬이가 숲별로 떠나고 말았다. 내가 그 잠깐 사이 물을 주지 않아서였다. 나의 돌봄에 감찬이가 있지 않아서였다.

일주일이 지나 돌아온 그녀는 감찬이의 상태를 보고 울적해했고 나 역시 크게 당황했다. 당연히 멀쩡할 거라 생각했다. 그때의 생각을 되짚어보면 난 식물을 사물이나 오브제처럼 여겼던 것 같다. 마치 원래 마땅히 그렇게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때 그녀는 내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봉천이와 감찬이도 우리와 함께 하는 식구이고 이 집과 마찬가지로 네게도 함께 돌볼 책임이 있다고. 나는 깊이 사과를 했고 다신 이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감찬이와 일별하고, 같은 오렌지 자스민인 '감찬 2세'를 들여왔다. 그리고 그 다음번 그녀가 집을 비웠을 때 봉천이와 감찬 2세는 여전한 모습으로 그녀를 반겨주었다.

그 때의 일이, 어쩌면 식물과 고양이를 돌보는 그녀와 만난 순간이, 이 책과 마주할 순간의 씨앗이 됐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한 이 책을 집어들 일도 없었을 테니까. 여태껏 식물은 내 삶은 커녕 내 주변의 것조차 아니었어서 서점에서도 우연한 눈길을 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식물에 관한 책을 선 채로 훑어본 것도, 구매까지 이어진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서점을 둘러보다 제목에 눈길이 갔고, 그녀가 떠올랐고, 사실, 그때부터 이미 좋았다. 식물을 기르는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기쁨과 생전 식물에 관심없던 내가 그녀로 인해 이 책에 눈길이 갔던 신기함만으로도.

낙관, 그 녹록치 않은 녹록함

식물은 녹록(綠綠)해지기 위해 녹록(碌碌)치 않은 계절을 보낸다. 책에서는 그런 식물의 성장을 지켜보며 낙관하는 일을 배운다. 낙관도 식물처럼 그 모습은 푸르게(綠) 보이지만 식물이 하는 일이 녹록치 않은 것처럼 낙관하는 일도 여간 녹록치 않으니까.

내가 받아들인 식물적 낙관은 본인만의 묵묵한 성장이다. 식물은 덤덤히 그 날 자라려는 만큼만 자라난다. 언제 얼마나 자라든 간에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우리도 그처럼 성장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식물처럼 그 속도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나의 속도로 내 성장을 지켜가는 일. 빨리 자라건 늦게 자라건 아무튼 커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 그게 식물에게서 배울 수 있는, 채취할 수 있는 낙관인 것 같다.

어쩌면 화분에 물을 준다는 빌미로 딴짓을 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내 마음을 한번 씻어내는 일은 회사생활의 중요한 루틴이었다.

막막하고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을 때면 가장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생각하는 일이 도움이 된다. 뿌리가 있고 뿌리를 심는다. 지키고 싶은 여름이 있고 그 여름날들을 지킨다. 여기 묶인 글들은 그런 낙관의 날들에 대한 기록이다.

멜라노크리숨은 그렇게 다시 '얼음' 상태가 된 채 어디에 힘을 쓸지 모색중이다. 새순들을 모두 풍성한 잎으로 키우면 좋겠지만 여전히 웃자라더라도 뭐 그리 큰일은 아닐 것이다. 다시 하면 되니까. 생각해보니 그렇게 여러 번 자르는 일은 여러 번 마음을 고쳐먹는 일과 같았다. 그러니 어렵고, 그러니 우리에게는 새로 만날 잎들에 대한 기대가 여전히 있는 것이다.

결국 식물을 기르면서 내가 하는 일이란 대체로 일상과 겹쳐 있다. 생각해보면 이런 것이야말로 가장 오래갈 마음이 아닐까. 준 것을 특별히 기억하지 않는 완전한 습관으로서의 돌봄, 혹은 사랑 같은 것 말이다.

오늘을 위해 그 오랜 시간을 얼음처럼 멈춰 힘을 기르고 있었구나 생각하면 그동안의 내 무지가 미안해지지만 그런 집사의 복잡한 마음이야 상관없이 올리브는 오늘도 자기 마음대로 자라고 더 높이 뻗고 새잎을 펼쳐 보인다. 바로 그것이 지금 올리브가 하는 일, 원래 자기 마음에 맞게 올리브가 해내려던 일이다.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식물을 이 공간으로 오게 한 것이 나라는 이유로 발코니에서 겪는 모든 실패와 성공에 '나'라는 변수를 넣어 관여하고 있지 않는가. 이때의 관여는 책임을 진다는 의미와는 다른, 부자연스럽고 맹목적인 '연연함'처럼도 느껴졌다.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조건은 한정적이고 우리는 절대 살아 있는 것들의 완벽한 관장자가 될 수 없다.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그런 공백 때문에 어떤 식물은 자라고 어떤 식물은 성장을 멈춘다.

그제야 나를 채우던 그 많은 상념들이 그치면서 나는 이제 막 가드닝에 취미를 붙인 초보 집사답게 그 식물을 있는 그대로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유지한다는 의식도, 감각도 없지만 바로 그러한 연유로 한 번도 자기 자신의 삶을 유기하지 않았던 산세비에리아의 실체를 말이다.

식물을 통해 내가 얻은 가장 좋은 마음도 그런 안도였다. 우리와 가까운 곳에서 식물들이 피고 지는 숱한 반복을 하며 가르쳐주는 것은 뭐 그리 대단한 경탄이나 미적 수사들이 아니라 공기와 물, 빛으로 만들어낸 부드럽고 단순한 형태의 삶의 지속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부디 자엽안개나무가 추위가 몰려왔을 때의 그 차가운 밤공기, 성장을 멈추고 숨죽이고 있을 때의 그 위축감, 그리고 다시 봄이 와서 마음껏 생장할 때의 눈부신 활력 모두를 오래오래 에너지원으로 썼으면 좋겠다.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힘이 있는 법이니까.

우리집 드라세나 수르쿨로사는 지난달부터 새로운 자기 계획을 실천중이다. 바로 높이를 경신하는 것. ··· 식물들의 계획에는 머뭇거림이 없는 듯 느껴진다. 어느 날 결심하고 실행해 원하는 선까지 밀어붙이고 멈춘다. 나는 그런 드라세나 수르쿨로사를 경애의 눈길로 올려보다가 깨달았다. 그것이 올해는 꽃을 피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 올해는 꽃을 내며 봄을 자축하기보다 화려하지 않더라도 공중으로 더 올라가보기를 선택한 것일까.

식물을 기르고 실패하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얻은 자세 중 하나는 자포자기와 일종의 정신승리가 뒤섞인 마음으로 내일의 운명을 기대해보는 것이다. ··· 그러니 일희일비할 것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일희일비하며 채워나가는 것이 발코니의 시간이라는 말이다.

가드닝을 하며 식물과 나는 생존의 드라마를 함께 겪지만 그것은 인간인 내가 구성한 것일 뿐 사실 거기서 발생하는 상념들은 식물 자체와는 무관하다. 그 무관함, 발코니에서의 날들이 계속되면서 나는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무관함이라는 생각을 한다.

식물에게는 지금 이곳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엄정한 상태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역설적으로 식물들의 낙관적 미래를 만들어낸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 성장할 수 있다면 환희에 차 뿌리를 박차고 오르는 것, 자기 결실에 관한 희비나 낙담이 없는 것, 삶 이외의 선택지가 없는 것, 그렇게 자기가 놓인 세계와 조응해나가는 것. 이런 질서가 있는 내일이라면 낙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녹록해진 일상

식물에 관한 책을 읽은 덕에 새로이 배운 단어들도 많아졌다. 대표적인 단어가 '자구'다. 봉천에 사는 주민들이란 의미와 뉴진스의 어감을 본따 '주민쓰'라고 부르던 봉천이의 새끼들이 있었는데, 공식적인 명칭이 '자구'라는 것도 알게 됐다. 이젠 그런 단어들이 곁에 둘 수 있는 말들이 됐다.

진짜 진짜 귀여운 주민쓰진짜 진짜 귀여운 주민쓰

곧 다가올 11월 말, 이사가 잘 마무리되면 나도 첫 식물을 들여볼까 한다. 낙관하는 태도를 눈앞에 두고픈 마음도 있고 저자분처럼 편파적인 다정의 기록을 남겨두고픈 마음도 있어서 어떤 식물이 좋을지 검색해봐야겠다. 관객의 취향도 이사를 하게 되면 방문이 쉽지 않기 때문에 10월중에 한 번 더 방문할 예정이다. 또 어떤 취향을 우연하게 알게 될지 모를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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